1.
1.
영화 '스캔들'은 쇼데르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라는 소설을 조선후기를 배경으로 각색한 영화이다. '위험한 관계'는 그 이야기의 매혹성으로 인하여 여러번 영화화 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영화는 아마도 존 말코비치와 미셀파이퍼가 출연하고 스티븐 프리어즈가 감독한 '위험한 관계'와 라이언 필립스와 리즈 위더스푼이 주연하고 로저컴블이 감독한 미국 틴에이저 버전인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일 것이다. 영화 '위험한 관계'는 원작에 충실하면서 출연한 배우들이 모두 명연기를 선보여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이하에서 '위험한 관계'는 영화를 지칭할 경우가 많지만 이 영화 자체가 원작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소설을 지칭하는 것으로 봐도 별 무리가 없다)
이재용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스캔들'은 '위험한 관계'와는 다른 영화가 될 것이라며 이 영화는 위험한 관계와 달리 젊은이들의 사랑을 밝고 유머러스하게 그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소설이건 영화건 위험한 관계는 '사랑을 실제로 해버린' 주인공의 파멸로 끝나느 비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 '스캔들'의 문제점, 즉 초반에는 가벼운 코믹 영화로 나가다가 갑자기 어느순간 비극으로 치닫는 구성상의 부조화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물론 영화가 시종일관 한가지 분위기를 유지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며 비극일수록 적절한 긴장완화는 필요하다(아마도 이것에 대한 좋은 예는 영화 '이중간첩'일 것이다. 이중간첩은 지나치게 어두운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였고 이로인해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꼈으며 그 결과 흥행에서 참패하였다). 하지만 '스캔들'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처음에 가벼운 섹스코미디로만 일관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조원이 사랑을 진짜로 느끼고서 조씨부인이 질투에 휩싸이는 순간부터 영화는 갑자기 별개의 영화인 것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문제는 이러한 전환이 너무 늦게 이루어진다는 점인데, 비극으로 치닫는 후반부는 늘어지던 전반부와 달리 지나치게 극 전개가 빠르다.


2.
'위험한 관계'에서 메르세이유 백작부인은 '스캔들'의 조씨부인과 같이 마음속으로 발몽을 연모하고 있다. 하지만 발몽이 뜨루벨 여회장을 사랑하게 된 것을 백작부인이 알게 되면서 질투감에 휩싸여서 발몽의 동침요구를 거절하고 발몽에게 자신의 명성(여자와 동침하며 사랑을 약속하지만 전혀 사랑하지 않고 냉혹하게 버리는 능력)을 유지할 것을 명령한다. 나중에는 당스니('스캔들'에서는 조도령)를 선동하여 발몽과 결투를 하게 하여 결국 발몽을 죽인다.
이에 반하여 '스캔들'에서 조씨부인은 조원과 숙부인사이를 질투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조원을 사모한다. 조원의 사망후 오열하고 나중에 조원이 준 꽃을 바다에 버린다. '스캔들'에서 조원이 조씨부인에게 '당신은 자신이 가질수 없는 것은 파멸시키려 하는구려'라고 말하는 대사는 실제로는 영화속의 조씨부인에게 해당되지 않으며 오히려 '위험한 관계'의 메르세이유 백작부인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숙씨가 시사회에서 조씨부인이 진정한 정절녀라고 말한 것은 타당한 것이다.
물론 조씨부인은 마음속으로 조원 한사람만을 사모했다는 점에서 '정신적으로' 순결을 지킨 정절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발칙한 대응을 하고싶어진다. '스캔들'의 두 주인공, 조씨부인과 조원의 관계를 보라. 조원은 수많은 여자와 동침한다. 또한 조씨부인은 자신의 남편과 기타 여러 섹스파트너와 성관계를 맺고 있다. 양 당사자는 서로의 상황을 이해한다. 이것은 무엇과 비슷한가? 바로 스와핑(Swapping)이다. 서로간의 합의를 통하여 자신의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용인하면서 동시에 결혼생활을 지속해 나가는 것. 물론 통상적으로 스와핑은 부부가 다른 부부와 합의하여 상대방의 배우자와 성관계를 맺는 4자간의 합의가 존재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스캔들'에서의 조원과 조씨부인과 같이 양당사자의 성적일탈을 용인하는 상황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씨부인과 조원 모두가 상대방이 자신이 아닌 다른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것을 '마음을 주지않는다는 조건'하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점은 일정부분 스와핑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3.
몇주전 부부스와핑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을 때 이에 대한 사람들 대부분의 반응은 충격과 불쾌감이었다. 사람들은 '갈데까지 간' 현대의 성도덕의 문란을 개탄했고 '활빈단'의 단장은 스와핑을 한 사람들에게는 개똥을 퍼부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수의 사람들은 스와핑 자체는 나쁘긴 하지만 법적인 제재가 부적절하다고 하였고 방송사의 사생활침해를 문제삼았다. 또한 스와핑 자체가 전혀 문제가 없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스와핑은 배우자와의 합의를 기초로 한다는 점에서 불륜과 달리 위선적이지 않고 정직하며 돈으로 상대방을 사는 매춘과 비교할 수 없다는 점을 내세웠다.
스와핑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스와핑의 적극적인 가치로서 '부부생활의 권태'를 없애며 부부관계가 더욱 좋아진다는 것을 든다. 물론 부부가 같이 생활하면서 서로에게 권태감을 느낄 수 있으며 스와핑을 하면서 상대방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도 있다. 또한 일시적인 불륜의 욕구를 스와핑을 통하여 충족하고 다시금 배우자에게 충실할 수도 있다.
스와핑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상류층의 성적타락'인데 스와핑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기존의 낡은 관습에 반대하는' 보다 진보적인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스와핑이라는 행위가 하나의 계급성을 나타낸다고 볼 여지가 있다.
물론 스와핑이 일반적인 불륜과 다른점은 여러 가지이다. 스와핑은 그 누구도 속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직하며, 남자가 불륜을 저지르면서 부인에게 정절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평등하며 참여자 모두 만족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이 증가하고 그 누구에게 피해주지 않는다(공리주의!).
사실상 이런 관점에서 스와핑을 비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스와핑의 이러한 공리주의적인 측면에서의 장점보다 스와핑이 가지고 있는 기만적인 환상을 주목하려고 한다. 그것은 1. 스와핑이 부부의 행복한 관계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환상 2. 스와핑은 '갈데까지 가 본다'는 환상. 3. 스와핑이 불륜 혹은 매춘보다 윤리적이라는 환상이다.
스와핑이 부부관계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자. 이것은 뒤집어 말한다면 스와핑을 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부부생활의 유지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와핑을 즐기는 많은 커플들은 스와핑을 1회의 일탈로 끝내지 않으며 클럽등에서 정기적인 모임등을 통해 스와핑을 계속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스와핑을 하지 않는다면 전혀 부부생활의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스와핑을 하는 부부들이 스와핑을 하면서 왜 기를 쓰고 부부생활을 유지하려고 하는것인가? 필자는 이 지점에서 스와핑을 즐기는 부부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결혼생활의 유지가 아니라 스와핑이라는 일탈 그 자체라는 결론을 내고 싶어진다. 스와핑을 하는 부부들은 스와핑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며 결혼생활의 행복한 영위가 그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의도하는 것은 '결혼생활은 하나의 수단일뿐이며 스와핑을 즐기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볼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한다는 목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면서 스와핑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외양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스와핑은 비록 그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정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륜보다 훨씬 더 기만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스와핑이 갈데까지 가는 행위라는 관념도 다시 검토하여야 한다. 스와핑은 갈데까지 가는 행위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외관'일 뿐이다. 스와핑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배우자와의 육체관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부부를 역시 사랑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이것은 스와핑은 갈데까지 가는 척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갈데까지 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이 바로 '스캔들'과 '위험한 관계'의 결말일 것이다. 즉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것을 버리지 않아서 파멸하는 것이 정말로 갈데까지 간 것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필자는 모든 사람들이 '갈데까지 가야'한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적당히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현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와핑은 '갈데까지 간다'라고 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그렇다면 스와핑이 불륜보다 별로 윤리적인 요소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여기서도 한가지 검토할 점은 남는데, 스와핑은 부인의 성적인 일탈의 기회를 동등하게 보장한다는 점에서 낫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데 남편이 스와핑을 통하여 부인에게 동일한 성적 일탈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 그 자체가 다른 여성과의 성관계를 하기 위한 하나의 핑계거리라고 보면 스와핑은 한층 기괴해진다. 간단히 말해서, 보통의 남자들이 다른 여성과의 성관계를 맺기 위하여 자신의 부인을 공급한다는, 즉 부인을 교환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보면 어쩔것인가? 물론 이것이 지나치게 남성의 관점에서만 본 것이라고 비판할 여지는 있으며 스와핑옹호론자들은 여성들도 동등하게 즐기며 스와핑을 요구한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가 지적했듯 인류사회에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교환의 수단은 여자였다. 스와핑은 결국 매춘을 하기 위하여(상대방 여성과의 감정적인 교류를 원천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스와핑은 매춘과 닮아있다) 화대를 주는 대신 자신의 부인을 제공하는 행위라고 본다면, 여성을 욕망의 수단으로 환원시키는 매춘과 달리 스와핑은 여성을 욕망의 수단으로 볼 뿐만 아니라 욕망의 수단의 교환수단으로 환원시키는 점에서 더더욱 사악하다.
4.
물론 스와핑은 이러한 기만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의 합의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와핑이 비윤리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은 역시 분명한 것이다. 우리가 극단적인 공리주의적인 윤리관을 거부한다면 '피해가 가지 않는 행위'가 곧 '바람직한 행위'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와핑을 하려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말로 갈데까지 간다면', '스캔들'의 조원이나 '위험한 관계'의 발몽처럼 파멸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화에서 죽어가는 발몽과 조원처럼 진정한 행복을 맛볼 것이다. 발몽과 조원은 이런저러한 핑계를 대는 스와핑옹호론자와 달리 '쿨한척'을 하기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훨씬 윤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