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 문제 언론 자료 창고/2003-2006

[당대비평2000.3] 빨간기와집, 배봉기, 오키나와

윤명숙 2004. 9. 6. 03:08

http://sarim.changwon.ac.kr/%7Edodemy/d-japan2.htm

 

3. [수평적 평화를 위하여: 오끼나와 심포지엄을 다녀와서], {당대비평} 10(봄특별)호, 2000. 3

 

    작년 정월 대보름날부터 서승 선생을 만나 오끼나와에 가겠다고 약속한 이유는 이 곳에서 열리는 국제심포지엄의 주제 때문이었다. 당시 이미 새천년에 대한 휘황한 전망과 행사들이 줄을 있고 있었는데, 나는 20세기 한반도의 분단과 질곡이 바탕하고 있는 근원적인 구조 밑으로 침잠해보고 싶었다. 심포지엄 주제 [미일의 냉전정책과 동아시아의 평화·인권]이야말로 한반도의 통일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저 세기말적 부박성에 맞서 새천년을 맞이하는 묵직한 화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오끼나와를 선택하였다. 


    1999년 11월 25일, 비행기에 자리하니 오끼나와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들이 양극으로 배열되었다. 하나는 류큐[琉球] 왕국의 문화, 홍길동과의 관계, 달밤의 가라데 등등 전설과 같이 아련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태평양전쟁의 처참한 상흔, 미군정과 미군기지 등 실존하는 무거움이었다. 산호초의 아름다운 바다 위에서 상극의 두 가지는 도대체 어떠한 모습으로 결합되어 있을까? 이륙 두 시간 남짓, 오끼나와의 섬과 바다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먼바다 흑조(黑潮)의 검은 색과 근해 산호초 바다의 에메랄드색은 참으로 인상적으로 대비되었다.


    심포지엄에는 한국에서 70 명을 비롯하여, 오끼나와 현지, 일본, 대만 등에서 총 300여 명이 참여하였다. 공식일정은 11월 26일부터 29일까지 여러 가지 발표와 토론, 무용·노래 공연과 영화 상영, 공식·비공식 답사 등으로 짜임새 있고 다양하였다. 여기서 다 언급할 수 없지만, 심야의 비공식 모임 또한 기대 이상의 재미와 소득이 있었다. 심포지엄에서도 여러 가지 중요한 발표들이 많이 있었지만, 별도의 심포지엄 자료집이 발간될 예정이니 여기서는 답사와 관련되는 몇가지만 언급한다.

 

    <류큐와 슈리성 : 수평적 교류와 책봉사·에도노보리>

 

    심포지엄 하루 전에 미리 도착하였던 한국측 참가자들은 다음날, 회의장으로 가기 전에 류큐 왕국의 수도였던 나하시(那霞市)를 답사하였다. 저 옛날 오끼나와 지방은 지금과는 달리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최근의 유적 발굴에 의하면 약 2만년 전 동남아시아·중국 남부 등의 육로를 통하여 인간이 오끼나와에 들어왔으며, 이들 중 일부가 다시 일본 열도로 북상하여 죠몬인[繩文人]이 되었다고 한다. 오끼나와에서 인간의 역사는 이처럼 유구하지만, 국가의 발달사는 일천하다. 14세기에야 겨우 세 국가가 발흥하였고, 15세기 초 이를 통일한 것이 바로 류큐 왕국이다. 


    14세기말-15세기 초 동아시아에는 대대적인 왕조교체의 시기였다. 중국에서 원(元)·명(明)의 교체, 한국에서 조선의 건국, 일본에서 무로마치[室町]에 의한 남북조 통일에 이어, 이곳에서 류큐 왕조가 성립되었다. 네 나라 신정권들은 각각 새로운 궁성을 건립하였다. 중국에 유명한 자금성(紫禁城), 한국에 경복궁(景福宮), 일본에 고쇼[御所]가 있다면, 류큐 통일정권이 만든 것이 바로 슈리성[首里城]이다.


    산 위에 있는 슈리성의 첫 인상은 동화 속의 성처럼 작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입구에 다다랐을 때 우리를 맞이한 것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콘크리트의 호(壕)였다. 이것은 일본군 제2군사령부가 있었던 지하 요새, 이 일대가 오끼나와전투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라는 것을 암호처럼 지령하고 있다. 슈리성도 이 때 완전히 소실되었으니, 오늘 우리가 본 것은 최근 다시 복원한 것이다.


    류큐 왕국은 16세기까지 동아시아 평화를 기반으로 하는 대교역시기를 맞이하여 국제무역으로 번성하였다. 슈리성의 정문이 "오는 손님을 기꺼이 환영한다"는 칸카이몽[歡喜門]인 것, 제2문이 "예를 지킨다"는 슈례이몽[守禮門]이며 류큐를 수례지방[守禮之邦]이라 하는 것도 이러한 평화적 개방과 교류의 역사를 표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류큐는 얼마되지 않아 중국과 일본의 굴레에 얽매이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슈리성 한가운데에 있는 남·북전이다. 류큐는 16세기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고, 이후 450여년에 걸쳐 24회의 중국 책봉사가 류큐에 와서 북전에 머물렀다. 그런데 전국시대가 끝나자 1609년 일본의 사쯔마번[薩摩藩]은 겨우 3,000의 병력으로 평화스러운 류큐를 침입하여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근 300년간 일본의 사신은 남전에 머물렀고, 류큐 또한 사은사(謝恩使) 에도노보리[江戶上り]를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슈리성 한가운데 남·북전의 병존은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다시 일본으로 에도노보리를 파견하던 류큐의 고달픈 이중외교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1879년 메이지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류큐 왕국은 완전 페지되고 일본의 오끼나와 현이 되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류큐 지방은 우리나라와도 적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 현립 박물관에는 "계유년 고려 장인이 만들었다[癸酉年高麗瓦匠造]"는 명문의 고려기와가 남아 있다. 만들어진 장소가 고려인지 류큐 지역인지, 계유년이 어느 해인지 분명치 않지만, 상호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류큐와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이미 [류구국기(琉球國記)]가 있고, 류큐는 성종 년간 조선을 앙모하는 국서와 더불어 대장경 하사를 거듭 간청하였다. 1502년 류큐는 조선으로부터 갈망하던 대장경을 얻어 슈리성 입구의 벤자이덴토[瓣財天堂]에 고이 보관하였지만, 이 역시 전쟁으로 불타 없어졌다. 국시가 평화 교류를 통한 번영이었고 또한 조선으로부터 문명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류큐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배정한 전쟁 분담금을 거부하였고, 이로 해서 사쯔마번의 침략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표류 등으로 해서 류큐와 민간 교류도 없지 않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홍길동에 관한 것이다. "홍길동이 죽지 않고 류큐로 갔다" "그의 부인이 류큐에 가서 신이 되었다" "율도국이 류큐이다" 등등의 주장이 흥미롭게 제기되기도 하며, 홍길동으로 해서 장성군과 오끼나와는 자매결연까지 맺었다. 그런데 최근 오끼나와 주변의 요나구니시마[ 那國島], 게라마[慶良間] 제도 남단, 아구니시마[粟國島] 북쪽에서 해저유적이 발견되었다. 오끼나와인들은 전통적으로 해마다 풍년을 기원하며 바다신 이라이카나이(イライカナイ)를 영접하는데, 해저유적은 바로 이라이카나이 신이 사는 성역으로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천손강림이라는 대륙의 수직적 정복신화에 비해 수평적 신국(神國)사상이라 할 수 있다. 홍길동에 대한 위의 주장들은 전문가들에 의한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홍길동전}의 율도국에는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온 구원자나 지배자가 아니라, 수평 유토피아에 대한 희구가 내장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후기 반란이나 민중설화에도 바다에서 진인(眞人)이 온다거나 섬나라 이상국을 희원하는 내용이 많다. 이처럼 수평 유토피아는 허균과 홍길동, 나아가 조선후기 민중들의 꿈이었을 것이다.

 

    <카타나가리와 가라테: 강요된 평화>

 

      류큐의 평화에 대한 극적인 표현은 전쟁에 익숙한 근대 서방인들의 대화에서 볼 수 있다. 1816년 영국의 라이라호 함장 바지르홀 대좌는 중국으로 영국대사를 호송하고 난 뒤 나하에 기항하여 40일 동안 머문 적이 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간 직후 {류큐탐험항해기}를 남겼는데, 여기에는 귀국하면서 세인트헬레나 섬에 들러 유배 중이던 나폴레옹과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바지르홀이 류큐의 무기 없는 평화를 소개하자, 나폴레옹은 "정말 아무 무기도 없단 말인가?" "대포도 없단 말이냐?" "소총도 없단 말이냐?" "그래도 창은 있을 것 아닌가?" "아니, 단도도 없단 말이냐?" "뭐라고, 전혀 무기가 없다구?" 등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으로 반문하였다. 바지르홀이 "저희가 아는 한 그들은 결코 전쟁을 해본 적 없으며 평화 속에 살고 있다"고 대답하자, 나폴레옹은 "도대체 저 태양 아래 전쟁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냐"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엉터리 얘기"라며 기묘한 표정으로 울부짖었다고 한다. 군함으로 대표되는 근대 해양 전쟁의 시기에도 섬나라 류큐는 아직 깊은 평화 속에 있었던 것이다. 


    공식일정 첫날(26일) 저녁 심포지엄 개회행사. 미군 기지를 반대한 것으로 유명한 전 오끼나와현 지사 오오다 마사히데[大田昌秀]의 특강이 있었다. 학자 출신답게 그의 강연은 정연하고 인상깊었다. 그는 바지르홀의 여행기와 더불어 오끼나와만엽집 {오모로사우시(おもろさうし)}의 가요 1543수 어디에도 "죽인다"는 단어가 없다며 평화를 강조하였다.


    이어서 만찬과 공연에서 류큐의 무용과 가라테를 구경하였다. 경쾌하고 아름다운 무용은 분명 평화시기 류큐의 낭만을 반영한 것이지만, 기(氣)와 호흡에 따른 가라테의 긴장된 근육조임이 지니는 내력은 조금 미묘하다. 일본 가라테는 오끼나와테를 기본 조형으로 하고 있을 정도로 오끼나와 가라테는 유명하다. 가라테는 공수도(空手道), 말 그대로 "무기를 들지 않은 빈손으로 하는 운동"인데, 여기서 "류큐에 무기가 없다"는 바지르홀의 여행기와 이어진다.


    흔히 건국과업을 완수하면 무기를 농기구로 바꾸듯, 15세기 류큐 왕국도 호족을 제압하고 문치입국을 위해 무기를 환수하였다. 그러나 1609년 사쯔마번[薩摩藩]이 류큐를 복속하고 난 이후, 카타나가리[刀狩] 즉 칼사냥이 처절하게 진행되었다. 침략자들은 대대적인 금무정책(禁武政策)으로 무기를 압수하고, 슈리성 안의 무예좌(武藝座)도 폐지하였다. 류큐인들은 사쯔마의 가혹한 식민정책 하에서 "맨손보다 위대한 무기는 없다"며 야음을 틈타 묘지 등 비밀스런 장소에서 가라테를 연마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류큐에는 자발적 전통의 평화도 있지만, 사쯔마번에 의해 강요된 평화도 있었다. 평화라는 이름은 같지만, 그 의미는 사뭇 다를 것이다.

 

    <태평양 전쟁: "철(鐵)의 폭풍"과 "죽음의 방황">


    평화스런 오끼나와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이 전쟁의 처참한 상흔이다. 1945년 3월 23일, 작은섬 오끼나와에 대한 미군 비행기의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되어, 이후 90일간 오끼나와는 태평양전쟁의 최대 격전지가 되었다. 6월 한달 동안에만 인구 1인당 52발의 탄환이 발사되었으니 가히 "철(鐵)의 폭풍"이라 할 만하고, 세 달 동안 20여 만 명의 인명이 손실되었다. 전사자 중에는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았으며, 일본군의 군국주의 세뇌와 선동으로 인한 집단자살도 적지 않았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은 오끼나와 한가운데에 상륙하여, 한 달만에 슈리성 이북지역을 대부분 점령하였다. 5월 중순 슈리성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어, 일본군은 이미 정규부대의 8할이 전사하여 궤멸상태에 빠졌다. 병력의 1/4~ 1/3이 전사하면 항복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5월 22일 일본군은 주민을 방패로 삼아 남부 철수를 단행하였다. 이리하여 오끼나와 남단의 조그마한 기얀[喜屋武] 반도에는 군인 3만, 주민 10만이 독안의 쥐처럼 갇힌 상태에서 포탄이 빗발치는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내몰렸고, "죽음의 방황" 끝에 "자살의 벽"에서 몸을 바다에 던졌다. 이처럼 섬 주민들이 대거 피를 흘리게 된 것은 일본군 사령부의 지구옥쇄(持久玉碎) 작전 때문이었다. 일본 본토 상륙을 저지할 시간을 벌고 천황제를 사수하고자 한 이 작전은 어느 정도 주효하였지만, 그것은 오끼나와인의 피로 성취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항복자는 전사자의 네 배정도 되지만, 오끼나와전에서는 옥쇄작전으로 전사자가 항복한 사람의 5.5배나 되었다.   


    심포지엄 둘째날(27일), 전쟁 유적지를 공식 답사하는 것으로 공식일정이 시작되었다. 촛불을 켜들고 조심스레 들어간 곳은 아부치라가마 또는 이토카츠호라 불리는 곳. 가마[ガマ]가 종유굴 등 자연동굴이라면, 호(壕)는 전쟁때 인공으로 구축한 것을 말하지만, 두 가지가 섞여있는 경우가 많다. 길이 2km정도의 이토카츠호는 오끼나와 전투때 주민들의 피난호이자 일본군 진지 및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 침침한 동굴에서 오끼나와 현지인들이 방언으로 대화하면 일본군은 스파이 혐의로 처형하였다. 동굴 중간쯤 있는 꽤 넓은 장소가 야전병원, 5월 말 남부 철수때 중환자 약 200명이 내버려진 채 죽어간 곳이다. 여기서 일행이 모두 촛불을 끄자 주변은 칠흑과 같은 암흑뿐, 간혹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동굴의 울림을 타고 소름을 더한다. 오끼나와를 대표하는 히메유리[姬百合] 유적도 190명의 소녀들이 동굴 속에서 죽어간 것을 기린 것이니, 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죽어간 백합 같은 소녀들.....아마도 전쟁의 진정한 단면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 코스는 오끼나와 남단 이토만[系滿]시 마부니[摩文仁] 언덕의 평화기념공원. 여기는 남부철수 이후 사령부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현재 평화기념자료관, 평화의 주춧돌, 평화의 광장과 평화의 불꽃, 한국인위령비 등이 있다. 현립 평화기념자료관은 마치 한 권의 책처럼 질서정연한 체제로 되어 있었다. 입구에는 책의 서문격으로 건립 이념이 요약되어 있고, 제1-제4 전시실에는 주민과 평화의 입장에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특히 제3실 증언의 집에는 각종 증언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책으로 묶어놓았을 뿐 아니라, 각자 직접 들을 수 있게 오디오시설을 부착해놓았다. 자료관 마지막에는 "희생의 대가로 얻은 양도할 수 없는 신조"가 시처럼 걸려 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확실히 인간이지만/ 그 이상으로, 전쟁을 막는 것 또한 /우리들 인간이 아닌가"


    역사 기억은 현실 이해의 반영일 터, 오끼나와에는 신가이드라인 통과 및 일본의 우경화 경향과 보조를 같이하여 태평양전쟁의 상처를 은폐하고 미군기지에 대해 현실 보상의 논리를 펴는 경향도 있다. 현 지사를 비롯한 행정당국은 평화기념자료관의 전시 내용을 감수위원의 승낙도 없이 변경하였다가, 현민의 비판에 의해 원상 복구되는 일도 있었다. 현재 자료관과 마주보는 위치에 새 자료관이 건립되고 있는데, 여기로 이전되면 전시 내용과 설명 또한 적지 않게 변질될 것이라고 한다. 이날 저녁 심포지엄 참가자들은 [오끼나와 현립 평화 기념 자료관의 전시 개찬에 반대한다]는 공동성명을 채택하였다.


    기념관 앞에는 아·적군을 불문하고 전몰자 236,09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평화의 초석]이 방사선으로 펼쳐져 있다. 우리나라 사람을 찾아보니 겨우 136명(북한 82명, 남한 54명). 1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오끼나와에 연행되었다고 전해지지만, 명단과 생사 여부는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공원 구석에 별도의 한국인위령탑이 있는데, 피해자 한국인이 가해자 일본인과 같은 장소에 이름을 새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에서 세웠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돌로 무덤을 만들었고, 그 앞에는 영혼을 조국으로 인도하는 양 한반도 방향으로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살펴보니 1975년 유신정권의 최정점에서 세워진 것이며, 비문 글씨도 오끼나와전 당시 일본 장교였던 다가끼 마사오[高木正雄] 즉 박정희가 쓴 것이다. 현실을 비틀기 위해 역사를 세우는 이러한 모순 앞에서, 이국 땅에서 방황하던 영혼들이 믿고 화살표를 따라 조국으로 올 수 있을는지?..... 향불이 붙지 않아 일행은 애를 태웠는데, 이것은 단지 저 무심한 바람 때문이리라, 갈길 잃은 영혼의 방황 때문은 아니리라. 애써 자위하지만, 돌아서는 걸음, 가볍지 않다.    


    방사선으로 펼쳐진 평화의 초석을 구심하는 자리에 평화의 광장이 있다. 원형 분수대의 출렁이는 물결 밑바닥에는 세계지도와 더불어 "평화의 물결, 영원하여라(Everlasting Waves of Peace)"가 새겨져 있고, 그 한가운데 평화의 불이 6월 23일 일출 방향으로 서 있다. 6월 23일을 기린 것은 일본군 사령관이 자살하고 공식적으로는 전투가 끝난 날이기 때문인 듯하다.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일은 명칭이 될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종전일이 실종되거나 평화운동으로 기리지 못하는 우리의 실정과는 무척 대비적이다. 우리는 아직도 전쟁중인가.   

 

    <전쟁 속의 전쟁: 위안부와 콘돔>

 

    심포지엄 세째날(28일), 한국사 전공자를 비롯한 몇몇은 공식 행사에서 벗어나 도카시키[波嘉敷島]로 향했다. 도카시키는 오끼나와 근해 게라이열도의 큰 섬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산호초의 바다와 하얀 백사장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것은 "빨간기와집"으로 대표되는 조선인 "위안부"의 흔적 때문이다. 오끼나와 전장에는 조선인 "위안부"가 1,000여명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해상특공정(海上特功艇)의 비밀기지가 있었던 게라이제도에 21명, 도카시키에는 7명의 "위안부"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중 5명은 태평양전쟁 중 도카시키에서 희생당하였고, 한 명은 종전 직후 오끼나와에서 정신병으로 죽었으며,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 바로 배봉기(裴奉奇) 할머니이다. 할머니가 사셨던 집이 바로 빨간기와집이다.  


    꽃다운 나이에 성노예로 이국땅에 끌려와 찢겨진 영혼들의 분노 때문일까, 도카시키로 가는 뱃길에는 차운 비 휘몰아치고 파도 또한 음산하여, 갈매기떼 온통 자취를 감추었다. 몇은 뱃멀미로 허덕이고, 몇은 답사 일정을 걱정하며 간신히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처음 찾아간 곳은 산 위의 아리랑 위령비. 최근의 것이어서 살펴보니, 1997년 재일한국인 박수남(朴壽南) 등이 세운 것이다. 그런데 혜진(惠眞) 스님에 의하면 박수남은 일본 국가 차원의 배상이 아닌 민간 차원의 아시아평화기금을 받자는 쪽이라고 한다. "위령비 하나 세우는데 그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세우곤 다시 민간기금이나 받으라 하니, 너희는 무엇을 하였는가" 영령들의 신음인 양 웅웅대는 세찬 비바람 앞에 몸을 가누기 어렵다.  


    다시 산을 넘어 찾아 간 곳은 329명의 집단자결비. 비문의 논조로는 집단 자살이 군국주의의 희생물인지, 영웅적 죽음인지 애매하다. 이처럼 불완전한 역사 기록을 만난다는 것은 아직 역사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리라. 그러나 자신의 아이를 면도칼로 자살시키는 것은 야수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바, 아무래도 전쟁과 파시즘의 광기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기에 무슨 애국이나 충절이 있으리요.


    선착장이 있는 작은 마을로 돌아왔지만, 이미 와 본적이 있는 혜진스님도 빨간기와집을 찾지 못하였다. 수소문한 결과, 집 주인은 지붕 개량으로 빨간기와를 없애버렸고, 답사객 또한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무슨 죄인처럼, 그 집 앞에 머물러도 정면으로 보아도 안된다는 조건으로 그곳을 지나갔다. 그래, 배봉기 할머니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할머니는 충남 태생이지만 멀리 중국 동북지방으로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끝내 "위안부"로 이곳 도카시키까지 오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배봉기", 일제의 "위안부"일 때는 "아끼꼬", 종전후 미군의 "위안부"일 때는 "노부에", 그후 오끼나와에서 생활을 할 때는 "노부코" 등 몇 번이나 이름을 바꾸었으니, 식민지의 딸이 겪은 신산한 삶의 파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1975년 "위안부"의 실상을 조사하는 재일동포를 만나고 난 이후에야 겨우 본명 배봉기를 되찾았고, 1977년 4월 "위안부"의 참상을 최초로 폭로하는 증언자로 나서기 시작하여, 그후 영화 {오끼나와 할머니}, 책 {빨간 기와집} 등을 통해 기회 있을 때마다 눈물겨운 증언으로 "위안부" 문제를 부각시키는데 공헌하였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전쟁을 증오하였고, 고국을 그리워하면서도 "미군 군대가 있는 한 고향에는 갈 수 없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91년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면서 "통일된 조국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조국은 식민지의 경험으로도 모자라 또 한번 치열한 전장이 되었고, 아직 남북이 분단되어 있으니, 할머니 앞에 우리는 진정 죄인인 것이다.


    다시 나하로 돌아와 도카시키를 안내한 구니에 요시[國吉勇]의 집을 방문하였다. 이 사람은 소독업자이지만 일주일에 두 번씩 동굴을 발굴하여, 무려 2,500여 구의 시신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현립 평화기념자료관보다 풍부한 유물로 가득차, 마치 악령의 전시장 같았다. 마지막 표정을 알 수 없는 인골들, 이름을 알 수 없는 인식표, 화염방사기에 찌그러진 맥주병의 대일본제국이란 글자, 쇠가 모자라 도자기로 만든 수류탄, 펄럭이는 욱일기(旭日旗)와 총검 군인을 새긴 자기 접시, 집단자살에 사용한 청산가리병, 총알이 박힌 해골, 화염방사기에 타서 다다미와 붙어있는 해골, 먹지 못한 건빵과 같이 타버린 손 등 너무나 충격적이다. 그는 일본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물이 적지 않다고 자부하였는데, 경기도 광주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더불어 사는 [나눔의 집]에 전시있는 콘돔도 구니에씨가 동굴에서 발굴한 국보급(?) 유물이다. 전쟁, 동굴, 환자들의 아우성, 일본군의 콘돔, 성노예의 신음 소리, 화염방사기의 섬광, 아수라장과 죽음, 긴 정적..... 이 악령의 전시장에 들어오면, 인간이라는 것이 죄스러울 따름이다.  


    29일날 심포지엄에서 대만 중앙연구원 중산인문과학연구소의 주더란[朱德蘭] 박사는 "위안부" 문제에 획기적인 발표를 하였다. 지진에도 불구하고 대만신문에 100회 이상 보도된 것은 확실한 증빙 자료 때문이었다. 이에 의하면 위안소 건설, 위안부 모집, 위안소 관리, 자금 동원, 위안부 출입국 신청 등의 모든 과정에, 일본 정부·군·기업이 삼위일체로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래도 일본 정부는 공식 사죄 없이 아시아평화기금이라는 민간측 보상으로 무마하려고 할 것인가? 이제 일본이 대답할 때이다.

 

    <미군기지: 오끼나와는 오끼나와가 아니다>

 

      태평양전쟁이 그래도 지나간 일이라면, 미군 기지는 오늘날 오끼나와가 당면한 최대 문제이다. 우리는 도착부터 그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관문 나하 공항도 미군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고, 나하 시내에 들어오자 현청 앞에서 사람들이 미군기지를 반대하며 농성하고 있었다. 오끼나와는 1945년부터 1971년까지 미 군정 하에 있었는데, 이 때에는 오끼나와인들이 일본에 갔다 오는데도 별도의 여권이 필요하였다. 1972년 이후 오끼나와는 일본에 통합되었지만, 여전히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아울러 일본의 자위대도 주둔하고 있다. 


    오끼나와는 일본 전체 면적의 0.6%에 불과하지만, 일본내 미군기지의 75%가 집중되어 있으며, 그 중 60%가 '용맹한' 해병대이다. 28일 오후 우리가 찾아간 곳은 후덴마[普天間] 기지. 8만 시민의 생활 터전 곁에 기지가 있어 소음이 심하고, 미군으로 인해 풍기 또한 문란해졌다고 한다. 1995년 9월 미군에 의해서 어린 소녀가 성폭행당하는 사건이 생기자, 주민들은 "어린 소녀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하는 안전보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주장하면서 기지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96년 미일은 후덴마 기지를 폐쇄하기로 하였지만, 대신 나고시[名護市] 헤코노[ 野古] 해변에 새로운 기지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후덴마 기지에서 1994년 5월 8일 [OpPlan 5027]에 따라 합동훈련 중이던 한국의 F-16과 미군기 F-15가 충돌하여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1994년 5월이면, 북미간에 전쟁위기가 한껏 고조되고 있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그래서 기억하기조차 치욕스런 때이다. 바로 이때, 오끼나와에서 한미 공군간의 실전훈련이 있었다니, 과연 오끼나와는 오끼나와가 아니다.


    해방 직후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장군이 오끼나와전선에서 왔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와서 보니 오끼나와는 동아시아 미일동맹체제의 핵심지대이며, 그 관장 범위가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 여러 나라를 포괄하고 있다. 한국전쟁·베트남전쟁·걸프전쟁 등 주요한 전쟁 때마다 극동 최대의 미 공군기지인 가테나[嘉手納] 기지에서 미군이 출격하였다. 29일 마치다 다다아키[町田忠昭]는 한국전쟁의 중공군·북한군 포로들을 오끼나와에서 재교육시켜 적진에 다시 스파이로 투입하였다는 놀라운 주장도 했다. 최근 오끼나와에서는 미군과 자위대와의 공동 훈련이 두드러지고 있는 바, 아마도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나면 이곳이 가장 주요한 발진기지가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4개의 팀으로 나눈 27일의 공식답사를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미군 기지 건설 예정지인 헤코노 해변으로 갔다. 여기서 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국제연대의 집회가 열렸는데, 한국측 참가자로는 청주대 강혜숙 교수가 아름다운 해변을 배경으로 평화의 춤을 추어 참여자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현지 주민들은 "생명을 지키는 모임"을 중심으로 기지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고래의 일종인 듀공을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듀공은 사람들과 가까워 이곳에서는 인어(人魚)라 부르며, 오끼나와 최대신인 이라이카나이를 모시고 오는 신의 사자(使者)로 알려져 있다.


    20세기 최고의 보름달이 떠오르는 1999년 12월 23일, 이곳에서는 미군 기지를 반대하고 아시아의 평화와 생명을 기원하는 만월(滿月) 만인(萬人)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그들은 직접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아시아 각지에서 한날 한시 보름달을 향해 21세기 아시아의 평화를 다짐해 주길 당부하였다. 그날 그들은 바다 가득한 보름달을 가슴에 안고 수직이 아닌 수평을, 죽임이 아닌 생명을, 기지가 아닌 듀공을 기원했을 것이다.


    헤코노 해변에서 돌아온 그날 저녁, 우리는 다카이와 진[高岩 仁]이 연출한 기록영화 [가르치지 않은 전쟁: 오끼나와 편}을 보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하였지만 영화는 깊은 충격을 주었다. 영화는 평화운동가인 아와곤 쇼코[阿波根昌鴻]의 일생을 축으로 오끼나와의 미군기지 반대운동과 그 성과, 나아가 전쟁과 기지가 지니는 정치경제학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  


    아와곤씨는 "전쟁을 시키면서 포성도 들리지 않는 별장에서 돈 계산을 하는 사람"들을 전쟁의 원흉이라 지적하였고, 영화는 제국주의 일본의 많은 전쟁과 경제적 이해의 함수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었다. 대체로 전쟁 이전에는 경제적인 정체를, 전쟁 이후에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주니, 일본의 경제 성장은 열전의 피와 냉전의 억압을 먹고 자란 것이다. 또한 미군기지 전문가인 아라사키 모리데루[新崎盛暉]는 "아시아에 미국과 일본을 공격할 수 있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반문하면서, 세계 GNP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미일 동맹은 "미일의 안보가 위협받아서가 아니라, 미일의 독점적 이해를 위한 것"이라 지적하였다. 미일동맹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일본은 아시아 각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며, 이 미일동맹의 가장 중요한 기지가 오끼나와라는 것이다. 실제 오끼나와에서는 베트남전쟁때 핵모의폭탄 투하 연습과 낙하 훈련이 있었고, 인근 이에지마[伊平屋島]에서는 남베트남 소년병들이 직접 훈련을 받았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트 독재정권을 위한 특수부대 레드 베레가 오끼나와에서 훈련받았다는 것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영화는 "손가락 하나 하나는 약하지만, 다섯 손가락으로 뭉친 주먹은 강하다"는 "다섯 손가락에서 배우는 공존·공영"으로 끝을 맺는다. 다카이와씨는 "가르치지 않은 전쟁" 시리즈로 [오끼나와 편]에 앞서 이미 [말레이반도 편]과 [필리핀 편]을 제작하였으며, 필리핀 편 제작과정에서는 영화에 협조한 현지인들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다음 편이 {중국·조선 편}이라 하니,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두렵고도 기대된다. 우리 영화계가 주로 미국·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유독 이런 영화를 배제하는 것은 아마도 뿌리깊은 사대주의 때문일 것이다. 미국·일본의 다양한 장르 중에서 헐리우드 등 지배적인 것만 배우는 것, 결국 이것은 지배받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영성(靈性)네트워크: 마음에 꽃을>

 

    28일 저녁, 즐거운 국제문화교류제가 있었다. 류큐의 고전음악, 아이누의 민족음악, 대만인의 공연 등이 있었지만, 역시 압권은 오끼나와 출신의 저명한 가수 키나 쇼키치[喜納昌吉]의 공연이었다. 아버지가 오끼나와의 전통악기인 사미센 명인인 까닭으로 그도 이에 정통하였으며, 최신 악기들도 능란하게 활용하였다. 그의 대표곡 "꽃" "안녕하세요" 등은 좌중을 온통 흥분시켜, 공연장에는 삽시간에 손에 손을 잡는 춤의 파도가 몰아쳤다. 나는 비로소 음악이 만국공통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는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평화·인권·환경문제에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운동가이며, 몇 가지 저작도 있었다. "모든 무기를 악기로/ 모든 기지를 꽃밭으로/전쟁의 폭약을 축제의 불꽃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꽃을 심자"고 노래하면서,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영성네트워크(靈性Network)도 제안하였다. 그는 류큐왕국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한반도 침략에 협력을 거부하여 사쯔마번에 복속되었다며, 한국과 오끼나와를 목숨을 함께한 친구[刎頸之交]에 비유하였다. 또한 통일된 한반도를 의미하는 "하나"가 일본말로 자신의 대표곡인 "꽃(하나)"과 발음이 같다면서 한반도의 통일을 기원하였다.


    평화의 영혼을 불러 세우고 서로 묶어주는 작업은 사실 현재 한반도만큼 절실한 곳도 없다. 3년의 한국전쟁은 석 달의 오끼나와전쟁보다 길었으며, 피해자 또한 15배를 넘는다. 그들에게는 미군기지가 문제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제3차 세계대전에 대해 묻는 철학자에게 "그것은 잘 모르지만, 제4차 세계대전은 확실히 없다"고 경고하였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한반도에서도 전쟁은 역사의 종언이며, 제3의 한국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과 평화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오직 평화만이 존재할 수 있다. 간디가 말한 바와 같이 "평화로의 길은 없다, 평화 그 자체가 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변변한 평화기념관 하나 없고, 오끼나와인들은 모든 것이 평화로 통한다. 최근 우리 정부도 남북의 평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좋은 전쟁도 없고 나쁜 평화도 없다" "평화는 정착하고 통일은 미룬다" 등의 언설은, 마치 동전의 앞면은 있고 뒷면은 없는 것과 같이 불구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경우 분단에서 전쟁이 비롯되었으니, 평화를 정착하는 뿌리는 다름아닌 분단의 청산이다. 따라서 통일 없는 평화란 분단의 연장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가 아니다. 진정한 평화가 아닌 "나쁜 평화"는 역사상 수없이 많다. 사쯔마번의 억압하 오끼나와에 강요된 평화가 그러하였으며, 브레히트가 갈파하였듯이 나찌하의 침묵도 평화가 아니라 범죄였다.

 

    <구체성을 더하는 것은 보편성을 넓히는 것>

 

    프랑스 아날학파의 대역사가인 브로델은 그의 제자에게 "영국에서 일년 동안 산다고 해도 영국에 대해 그리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네가 너무 잘 알아서 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 프랑스적인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지적한 바 있다. 생소함이나 거리감은 분명 너무 가까이 있어 볼 수 없는 것들을 깨닫게 한다. 


    오끼나와로 올 때 냉전과 인권에 관심을 두면서도 오끼나와는 하나의 낮선 타자였다. 그러나 와서보니 오끼나와에는 한반도의 구조와 객관을 비쳐주는 거울들이 있다. 전쟁, 기지, 평화, 생명 등등. 여기에 우리의 과거도 있고 미래 또한 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우리 문제의 구체성을 더하고, 다시 그만큼 보편성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오끼나와, 아니 아시아 전체가 역사적으로 수직적 패권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 미래는 수평성의 확보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아시아가 가진 특유의 장점을 가감없이 살리고,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어울려져 차원높은 문화를 구가할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1999년 12월 23일, 나는 헤코노 해변의 만인만월축제를 생각하면서 인근 해변으로 갔다. '달 하나가 수많은 강을 비춘다' 하였으니, 오늘밤 아시아인들은 모두 수평적 평화의 달을 가슴에 품으리라.